복음묵상

연중 제16주일

임젤덕산 2020. 7. 17. 15:56

제1독서 지혜 12,13.16-19

제2독서 로마 8,26-27

복     음 마태 13,24-43

 

 



종종 제 글을 사용해도 되냐는 문의를 받습니다.

그때 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합니다.

“제 글에는 저작권이 없습니다. 마음대로 사용하십시오.”

창조자는 오로지 하느님께만 붙일 수 있는 호칭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단지 모방할 따름이지요.

저 역시 글을 쓰고 있지만 완벽한 새로움은 없다고 봅니다.

언젠가 읽었던 글의 내용, 누군가에게 들은 내용들이 내 삶과 연결되어서

묵상 글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그래서 종종 제 글에 이러한 댓글을 대시는 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신부님, 어떻게 제 이야기를 콕 집어서 하십니까?

제 얘기를 하시는 것 같아요.’

그분을 만난 적도 없고 따라서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 글에 공감을 느끼는 것은 같은 시공간 안에 살면서

서로 비슷한 체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인데 제가 감히 저작권을 어떻게 주장할 수가 있겠습니까?

한 번은 어느 신자로부터 자기 본당신부님께서 미사 때

저의 묵상 글을 토씨(조사)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읽는다는 고발(?)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미사 내내 분심이 드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순간 스스로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좋은 글이라고 하면, 몇 번을 읽어도 또 다른 사람이 읽어도 좋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제 글에 분심이 드셨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글이 아니었구나 싶었습니다.

그 신부님을 미워할 필요도 또 판단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오늘 글이 별로라서 다시 듣는 신부님 강론이 와 닿지 않는구나.’

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즉, 좋은 글이라 생각하면 또 들어도 좋다고 받아들이면 되고,

나쁜 글이라 생각되면 쿨하게 안 들으면 됩니다.

누군가를 판단하면 결국 힘들어지는 것은

부정적인 생각 속에 머물고 있는 ‘나’ 자신일 뿐입니다.

왜 손해 보는 일을 스스로 나서서 하고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원수가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린 것이지요.

분명히 좋은 씨앗이었지만 가라지와 함께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가라지를 거두어 낼까요?”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좋은 밀까지 뽑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수확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지요.

그리고 가라지는 태워 버리고, 밀은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도 판단을 뒤로 미루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판단은 어떠했을까요? 늘 재빨랐습니다.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확실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얼마나 재빠르게 이루어집니까?

사람에 대해, 그리고 확실하지 않은 것은 심판 날에

주님께서 판단하시도록 두어야 합니다.

미리 판단하면 힘들어지는 것은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지혜서는

“당신께서는 힘의 주인이시므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저희를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라고 전해줍니다.

주님의 자비를 본받아 우리 역시 내 이웃들에게

자비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데는 그의 친구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적을 함께 봐야 한다.(조셉 콘래드)

 

밀과 가라지 구별하기 힘들지요?

 

 

 

 


                      어제 조카 집 축복이 있었습니다. 축복식 후, 직접 만든 초계면을 맛있겠 먹었습니다.


 


- 빠다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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