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주의기도

고통의 신비 5단

임젤덕산 2010. 4. 3. 19:07

#성가 : 489번 1,2,3절

 

고통의 신비 제 5단 :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Fifth Sorrowful Mystery :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

 

♥ 그 어떤 부모도 남의 자식 살리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외아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을 것이며,

죽을 줄 뻔히 알고 있는데 외아들을 적진에 보내어 죽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즉, 당신의 외아들을 팔아서 우리를, 나를 사신 것.

우리는 이것을 사도신경에서 고백하고 있으며 이것이 신앙의 신비인 것.

♥ 인간의 계산은 하나에서 하나를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지만

하느님 계산은 하나에서 하나를 빼도

그 결과 수십만, 수백만, 수억이라도 가능하시다.

성부께서는 예수님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이를 구원하신 것. 이것이 하느님의 계산 방식.

♥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 모든 물질은 한계가 있다.

태어남과 죽음의 법칙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와 죄는 스스로 아무리 몸부림쳐도 구제 불가능이고

하느님의 자비를 만날 때 가능.

인간의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으로 치유되고,

인간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다시 살아날 수 있다.

♥ 자, 눈을 감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묵상---

길고 두꺼우면서도 날카로운 쇠못을 예수님의 손바닥에 대고 망치로 내리칠 때 “탕, 탕, 탕” 소리가 골고타 골짜기에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어 본다.

고통에 짓눌린 예수님의 얼굴은 또 어떠하실까 상상해 본다---

도대체 그 고통의 도가 얼마나 심했으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일까?

그 극심한 고통을 통해 주님은 나를 구원하셨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은 충실히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랐던 증거이며,

십자가의 죽음은 임무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차원의 시작. 즉 부활의 영광,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

 

성서는;

마르코 16, 33-41 마태오 27, 45-56 루가 23, 44-49 요한 19, 28-30

 

핵심성서 : 루가 23, 46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

 

 

 

묵상 주제; 최종적 궁극적인 구원하심을 위하여(for final perseverance)

-. 누구를 위하여 혹은 무엇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것이 자신에게 있는가?

-. 죽음의 철학은 무엇인가?

-. 나의 죽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는가?

   그 인생 유종의 미를 위해 노력하는가?

 

#성가 : 125번 1절

 

 

 

 

※ 막시 밀리안 콜베 신부님과 그분의 죽으심

이런 죽음도 있다.

1800 말~1900 초에 살았던 분으로 우리와 동시대 사람,

꼰벤뚜알 프란치스꼬 수도회 수사.

폴란드 출생이고 그 나라는 성모신심이 강한 나라인데다 사회주의가 거쳐 간 나라.

폴란드에는 블랙 마돈나(Black Madonna) 가 유명하고 폴란드 교회는 사회주의 정권을 이긴 나라인데 그것은 성모신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콜베 신부님은 성모 신심의 전통 배경에서 출생했고 성장했다.

그에게 성모님이 꿈에 나타나시어 붉은 관, 흰 관을 보여주시며

어느 것을 원하는가? 하셨을 때 둘 다 원한다는 대답을 하고 꿈에서 깨어났다.

붉은 것은 순교, 하얀 관은 독신과 정결 의미.

그가 수도원에 입회하여

나중에 서품 전 로마에 있었을 때

레닌, 후르시쵸프의 사회주의 정권이 점차로 물들어 오는 것을 보고

교회를 지키기 위한 결심을 했고 서품 후 폴란드에 가서 “성모의 마을”을 세우셨다.

제 2차 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의 히틀러는 폴란드 바르사바 침공으로 시작.

침공 시에 방송, 관공서 공략.

콜베 신부도 체포되어 16670 이라는 수인 번호를 받게 된다.

그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무차별 지명으로 사형수를 선정할 때 한 젊은이를 대신하여 브리츠 수용소장에게 자청하여 아사, 즉 굶어죽는 것을 스스로 원하여 당한 것이다. 이 때 수용소 안에는 죽음이라는 공포의 분위기가 무너져 내리게 되었다고 대신 살아난 프란츠 가요프니체프가 증언하고 있다.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는 두 가지.

-. 예수님 말씀 중에 요한 15, 13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라고 하셨는데 순교는 교회의 전통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만 콜베 신부님은 한 젊은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랑의 순교라는데 또 다른 의미가 있다.

-. 왜 고통의 장소에 가려 했을까?

사형수로 지명되어 죽어야 할 나머지 9명을 안아주려는 것.

착한 목자로서 이리와 늑대가 오면 달아나는 것이 아니고

또 계산적이고 경제적인 논리가 아닌 착한 목자로서의 계산법인 것인데

그것은 99마리는 놔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 예수님을 닮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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